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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E _ 기고

우리에게만 낯선
만드는 이가

 필자는 평론가가 아닌 건축가다. 필자는 사유(혹은 감각)를 물리적으로 구축하는 ‘만드는 이’다. 다시 말해서, 구축 이면의 사유(감각)를 포착하는, ‘쓰는 이’에게 소재를 제공하는 이다. (물론, 그들이 관심 가질 때의 얘기지만) 그러니 어찌 보면, 역할을 바꾸어 글을 쓰는 셈이다.

 ‘쓰는 이’가 되어 기대하는 바는 두 가지다. 하나는 역지사지로 ‘평론’의 역할과 가치를 곱씹어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만드는 이’의 작업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건축을 하다 보면, 동시대 다른 이의 사유(프로세스)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만드는 이의 평론하기’는 그러한 호기심을 조금 더 깊게 충족시켜 줄 것이다. 그럼 각설하고, 요앞 건축사사무소(이하 ‘그들’ 혹은 ‘프로젝트명’)의 작업을 들여다보자.

대안이 되어버린 ‘동네’에 일조하는 (경리계단길, 길의 지층, 2023)

 건축은 도시(간혹 자연)에 공간을 끼워 놓는 일이다. 그렇기에 프로젝트를 맡은 건축가의 첫 고민은 자연스레 앉음새, 그러니까 맥락적 조응으로부터 시작된다.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그들은 그들의 작업을 설명하며, 건축이 자리할 맥락에 큰 관심이 없는 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경리계단길’과 ‘길의 지층’을 보면 그렇지 않은듯하다. 

 그들은 두 프로젝트의 제목에서 암시하듯, 길을 세심히 다룬다. ‘경리계단길’은 경사진 동네 (계단)길을 방향과 너비를 바꾸어가며 건물 정상까지 계단으로 이어간다. 덕분에 5층 높이의 계단길은 서로 다른 출입구 위치와 함께 지루함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는 엘리베이터를 놓기 힘든 협소 상가의 영리(營利)적 해법일 것이다. 사실, 날씨(특히 눈과 비)에 노출되는 외부 계단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조망을 향한 계단길을 만들며, 임차료를 차이 짓는 층의 개념을 희석한다. 그리하여 위치(숫자)가 아닌 장소성을 강화한다. 

  ‘길의 지층’은 어떤가? ‘경리계단길’보다는 소극적이지만, 길에 대한 그들의 고민이 보인다. 동네에서 흔히 보는 다세대주택의 필로티 주차 공간은 보통 건조하다. 세로형 연접 주차로 단면이 깊어지는 경우 어둡기까지 하다. ‘길의 지층’을 보면 이러한 상황에 주목한 듯 보인다. 그들은 주차면을 가로에 평행하게 배치하여 단면 깊이를 최소화하고, 둔각으로 열린 단면을 만든다. 그리하여 (시각적인) 구조적 안정을 도모하는 둔각이 유리창과 함께 비교적 밝은 표정을 가로에 드러낸다. 

 이렇듯 두 작업은 ‘동네’를 살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들은 ‘경리계단길’을 설명하며 ‘동네 건축’이 왜 차량 중심의 법규를 따라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반문했다. 짐작건대, 그들은 동네 ‘길’에 먼저 주목했을 것이다. 그렇게 ‘길’에서 ‘장소성’을 추출하고 ‘보행 친화적 가로 만들기’의 작은 실천을 도모했을 것이다.

 동네 살핌은 재료 선택으로 이어진 듯 보인다. ‘경리계단길’의 외부 마감은 주변 외부 마감과 결을 같이 한다. ‘길의 지층’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당시 많이 사용되던 붉은 벽돌” 건물이 들어선 “꽉 짜인 주택가에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하려는 듯 보인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목(길의 지층)답게 서로 다른 지층이 켜켜이 떠 있는 모습이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예를 들면, 입면의 수평선이 질감이나 색감을 점층적으로 달리하여 거주 개별성을 조금 더 드러냈더라면, ‘경리계단길’처럼 장소성을 조금 더 강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아쉬움은 세대 내부로 이어진다. 세대는 거실과 주방을 중심으로 한 벽식 구조다. 바꾸어 말하면, 아파트 단위세대 얼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덕에 다세대주택은 2등 상품으로 인식되기 쉬워진다. 아파트와 정량적 비교(방 개수, 면적)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아파트(최선) vs 다세대주택(차선)의 인식을 깰, 그러니까 아파트와 비교하기 어려운 세대를 계획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다세대(다가구)주택의 문법을 깨기는 어렵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건축은 부동산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발을 딛는 건축가가 수익성(시장의 요구)을 외면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들 역시 그러한 현실을 직면하여 인정했을 것이고, 그렇기에 세대 밖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삼각형 형상의 우편함과 계단 형상의 난간과 장식, 사이니지 같은 곳곳의 볼거리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우리네 동네는 아파트 단지로 재편되어간다. 곳곳의 재개발은 어김없이 아파트 단지를 꿈꾼다. 동네는 아파트 단지의 어쩔 수 없는 대안으로 전락한 듯 보인다. 삶의 공간이 단지(게이티드 커뮤니티)로 재편되는 형국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동네 건축이 동네를 살리려면 도시관리계획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서울시의 ‘신속통합기획’을 보라) 그렇다면 애석하지만, 건축가의 ‘동네건축’에 기대어 ‘동네’를 환기하는 수밖에 없다. 현실적 한계를 보이긴 하지만 ‘길의 지층’과 ‘경리계단길’은 동네가 동네로 남기 위한 건축적 접근을 보여준다. 그들은 동네를, 그러니까 ‘맥락의 위기’를 고민했음이 분명하다. 

주) “  ”인용 : 제1회 「디자인 강동 건축상」 작품 설명서(요앞 건축사사무소 작성) 中 발췌.

아직까진 낯선 장면의 합집합 (소요재, 2021)

 필자는 어떠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건축에 접근한다. 반면, 그들은 건축을 장면으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듯 보인다. 필자에게 ‘소요재’가 다소 낯설게 다가오는 이유다.

 ‘소요재’는 주변 풍경에 의연하다. ‘소요재’는 산세를 올라탄 병풍 같은 아파트와 부조화한 스카이라인 같은, 우리네 도시에서 흔히 마주하는 ‘볼거리 없음’에 ‘볼거리 만들기’로 대응하는 듯 보인다. 그러한 대응은 다이어그램에서 보듯, 장면(건축적 요소) 중심으로 이루어진 듯 보인다.

 ‘소요재’를 둘러보면 다양한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주 출입구에 해당하는 잔디마당을 보면, 몸체(매스)와 분리된, 계단을 걸쳐 놓은 벽이 하나 서 있다. 이 파스텔 색조의 벽은 원형과 아치형 개구부로 파스텔 색조의 계단을 받아준다. 그리하여 비교적 차분한 패턴의 매스와 병치를 이룬다. 이러한 장면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지하 갤러리의 선큰과 3층 테라스에는 조형물 같은 파스텔 색조의 나선형 계단이 보이고, 옥상에는 건물의 외곽선(사각형)과 형태를 달리하는 원형 옥외 공간이 보인다. 이들은 그것을 받아주는 환경(매스, 벽면, 바닥)과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그러한 요소들은 “가볍고 다채롭게 계획해 전체와 부분을 충돌“시키려는 의도의 결과인듯하다. 이러한 의도는 입면으로 이어진다. 몽글몽글한 단면 형상의 타공판(스크린)과 아치형 개구부, 수직과 수평 패턴 같은 요소가 입면을 다채롭게 구성한다.

 ‘소요재’는 곳곳에 스스로 볼거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 덕에 곳곳에서 다채로운 장면을 조우하게 된다. 이를 뒤집어 이야기하면, 어떠한 분위기를 경험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된다. 건축 경험이 어떠한 분위기로 귀결되려면, 레이아웃부터 재료와 패턴, 색감까지 하나의 분위기에 종사해야 한다. 하지만 ‘소요재’의 장면들을 보면, 힘을 빼고 장면, 장면을 충실히 만든 듯 보인다. 그 덕에 유쾌하지만, 동선(시간)이 빚어내는 하나의 분위기를 느끼기 어려워진다.

 장면과 분위기, 이분법적으로 이해할 개념은 아니지만, 이 지점에서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건축 경험은 하나의 분위기로 귀결되어야 하나? 서사 아닌 순간을 소비하는 SNS에 익숙한 우리가, 건축을 그렇게 경험하면 안 되나? 순간은 정서에 깊게 안착할 수 있을까? 부분 컷이 더 돋보이는 이 ‘장면’의 건축은 곱씹을 거리를 품고 있다.

주) “   ” 인용 : 작품 설명서 (요앞 건축사사무소 작성) 中 발췌

우리에게만 낯선 풍경 (선홀아이, 2019)

 ‘선홀아이’는 ‘소요재’ 이상으로 낯설다. 건축 이면의 사유를 포착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다. ‘선홀아이’를 처음 마주한 순간, 분석과 이해는 무력해졌다. ‘선홀아이’는 감각을 편히 펼쳐 놓은 듯 보였다.(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공 과정을 보면 쉽게 만든 풍경이 아니다.)

 ‘선홀아이’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붕 형태다. 박공도 맨사드도 아닌, 중력에 편히 순응하는 것도 아닌 모습이 동화적이다. 이는 건축가의 감각에서 도출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동화적 감각은 지붕 아래 원형 창과 곡선 창(민박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햇살 좋은 실내 풍경으로 이어진다.

 지붕만큼이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 패턴을 가진 콘크리트 외벽이다. 다가갈수록 눈에 들어오는 수직 패턴은 입면과 별 상관관계가 없다. 그리고 ‘경쾌한 묵직함’을 원하는 모순도 보여준다. 이러한 모순적 욕망은 지면에서 띄운, 그리고 상부 끝까지 이어진 패턴에서 예리하게 드러난다.

 ‘선홀아이’는 두 삼각형 평면이 45도로 등지며, 높은 전면과 낮은 후면을 드러낸다. 이는 가급적 질서와 거리를 둘, 건축가의 감각으로 빚어질 ‘어떠한 풍경’의 얼개로 보인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지붕과 콘크리트 패턴은 그러한 풍경을 완성하는 요소로 보인다. 이쯤 되니 그들은 어떠한 감각으로, ‘어떠한 풍경 만들기’를 시도했으리라 추론에 이른다.

 다시 ‘선홀아이’를 마주했던 순간으로 돌아간다. 익숙함이 무색해졌던 그날의 ‘어떠한 풍경’이 떠오른다. 동행했던 이들의 눈치로 짐작건대, 건축하는 이에게 그 풍경은 어리둥절할듯싶다. 그렇다면 우리(건축계 혹은 엘리트적 태도)에게만 낯설 것 같은 이 풍경의 ’어떠함‘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필요하면 ‘우리’ 밖으로 나와서 보면 된다. 그러면 그들의 치열한 만듦이 향했던 ‘어떠함’이 어떠할지 조금 더 선명해질 것이다.

만드는 이에게

 ‘요앞’에 대한 기억은 두 가지로 남을듯하다. 첫째는 그들과의 만남에서 느꼈던 동지애다. 지어지는 건축은 협업으로 성취되기에 동업은 큰 힘이 된다. 하지만 현실의 동업은 여러 이유로 쉽지 않다. 그렇기에 동지애를 품은 그들의 동업은 부러움을 살만하다. 건축가 홀로 분투하는 일은 없을듯하기에.

 둘째는 반문하는 용기다. ‘요앞’은 건축에 질문을 던진다. 답습(학습)은 쉽지만, 반문은 어렵다. 반문의 결실이 보장되지 않아서다. 그럼에도 그들은 반문의 여정을 즐기는 듯하다. 여기서 주제넘게 한마디 보태자면,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건축적 사유는 구축(혹은 부대적 결과)으로 드러나기에, 누군가는 그들의 구축(반문)을 곱씹으며 지켜보리라. 그러니 ‘요앞’답게 정진하면 될 일이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기억이 그들의 정체성으로 꽃 피우기를, 그리고 이 글이 ‘만드는 이’에게 생산적 평론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