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5
도시, 기억-시간-미래
<Part4> 서울, 기억과 생활의 재생
주최: 서울시 교육부, 한국연구재단
발제요약
[환형(環形)의 기억 고리, 한양 성곽]
한양 성곽은 서울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구도심의 경계를 구분 짓는다. 그리고 조선의 한양부터 일제강점기의 경성을 지나 산업화 시기와 현대도시 서울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다시 말해 역사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시간의 뫼비우스 띠인 셈이다. 한양 성곽의 매력이 배가되는 이유다.
한양 성곽은 약 70%가 남아 있다.(대부분 복원의 결과다) 하지만 체감상 그렇지 못하다. 평지 구간이 상당 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이다.(복원이 어려운 결과다) 덕분에 한양 성곽을 제대로 즐기려면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조금 수고스럽긴 해도 능선에서 만나는 한양 성곽은 메가시티에서 접하기 힘든 풍경으로 화답한다.
[한양 성곽과 창신,숭인동]
산세를 따라 흘러가는 한양 성곽 주변은 대부분 자연 그대로다. 하지만 낙산 구간(혜화문-흥인지문)은 끊임없이 주거지와 접한다. 한국 전쟁 후 도시로 몰려든 저소득계층이 도심(종로)와 가까운 낙산에 자리 잡은 덕이다. 지금도 낙산 주변의 주거환경은 열악하다.
2014년 서울시는 낙산 성곽길 옆 창신, 숭인동을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선정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큰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개발과 달리 재생은 변화를 천천히 도모하기에 조급해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성곽 동네라는 특성을 감안, 좀 더 고민할 부분이 있어 보인다.
[‘기억’과 ‘생활’의 재생]
앞서 이야기했듯, 한양 성곽을 제대로 즐기려면 산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렇다면 한 구간쯤은 편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낙산 성곽길을 따라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다면?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한양 성곽 구간도 만들고 주거환경 개선 인프라도 마련하고 일석이조 아닐까?
2020-07-27
2020-05-25
자세한 내용
20세기 초 도시들은 인구 과밀화와 자동차 대중화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다시 말해 급변하는 상황에 대응할 새로운 도시건축 모델이 필요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인물은 20세기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였다. 그는 혼잡한 도시를 자동차 통행에 유리하게끔 격자형의 대로 체계로 재편하고 단일용도의 수퍼블럭(super block)으로 나누어 표준화된 건축을 대량 공급할 것을 주장했다. 한 마디로 산업화시대를 맞아 도시건축도 기계적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거였다. 이후 르코르뷔지에의 모델은 현대도시의 표준이 되었다.
1990년대 초 미국에서 뉴어버니즘(New Urbanism) 운동이 시작됐다. 뉴어버니즘 운동은 르코르뷔지에의 모델과 반대로 단일용도제 대신 혼합용도제를, 획일화된 대규모 주택공급 대신 다양한 유형의 주택공급을, 자동차 대신 보행자 중심의 도시건축을 제안한다. 그럼으로써 걷고 싶은 도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어울리는 도시를 만들자고 이야기한다. 이후 뉴어버니즘 모델은 현대도시의 새로운 지표로 자리 잡으며 도시건축의 변화를 유도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르코르뷔지에의 모델은 기계적 효율성을 추종할 뿐 그러한 환경에서 살아갈 인간의 심리와 그로 인한 사회적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 결과 현재의 도시건축은 그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도시건축은 공간과 장소로 ‘관계’를 담아낸다. 도시건축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한 삶을 담는 것이라면 관계 맺기의 변화를 기술, 심리, 정서라는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산업화시대의 도시건축론처럼 기계적 효율성에 경도되어 심리적, 사회적 측면을 간과해서는 행복한 삶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세기 만에 다시 한번 큰 변화 앞에 섰다. 4차산업혁명과 코로나로 촉발된 언컨택트 사회로의 진입이 바로 그 변화다. 그렇다고 비대면접촉이 새로운 생활방식은 아니다. 우리는 이전부터 기술발달에 힘입어 우리 삶의 비대면접촉 비중을 꾸준히 늘려왔다. 다만 코로나 사태로 비대면접촉의 비중이 변곡점을 남길 만큼 급상승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식인들과 언론은 코로나 이후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 삶을 담는 도시건축도 완전히 달라질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관계 맺기 방식의 변화를 점검해봐야 한다. 도시건축은 공간과 장소를 통해 관계를 담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으로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건 기술과 비용이 허락하는 한 심리적으로 불편하거나 비효율적인 대면접촉이 비대면접촉으로 꾸준히 대체될 거란 거다. 그렇다면 여전히 유효할 대면접촉 관계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미국의 도시사회학자 레이 올덴버그는 그의 저서인 ‘제3의 장소(The Great good Place)’에서 주어진 사회적 역할만으로는 인간 본연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집(제1의 장소)과 회사 혹은 학교(제2의 장소) 밖의 사회적 교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교류는 펍이나 카페 같이 평등한 관계로 부담 없이 들릴 수 있는 장소(제3의 장소)에서 이루어진다며 이러한 장소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사실 그의 주장은 우리의 일상만 둘러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코로나가 심각한 단계를 벗어나자 술집과 카페가 다시 사람들로 차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교류에 대한 욕구를 비대면접속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까? 첨단기술은 대면 교류를 흉내 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흉내일 뿐이다. 기술이 어지간히 발전해서는 대면을 통한 정서적 교류를 완벽히 구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정서적 교류를 비대면접속으로 교체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렇다면 미래에 살아남을 대면접촉 관계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정서적 관계뿐일까? 아닐 것이다. 재택근무만 봐도 심리적 외로움과 도덕적 해이, 혁신적 성과 도출의 어려움 등 다양한 이유로 평가절하하는 관계자들이 많다. 또 관련 연구결과를 보면, 대면으로 일한 그룹과 대면 후 온라인으로 일한 그룹 그리고 온라인만으로 일한 그룹의 생산성을 평가하는 실험에서 대면으로 일한 그룹의 생산성이 가장 높게 나왔다. 물론 개인의 생산성이냐 조직의 생산성이냐에 따라 또 일의 성격에 따라 평가 결과는 다를 것이다. 여하간 재택근무가 대면 업무를 모두 대체할거라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쇼핑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판매 비중이 커지는 상황에서도 기업들은 '체험 소비'를 기획한다. 온라인에서 맛보기 힘든 체험을 무기로 소비를 유도하고 브랜드 충성도를 높이는 전략은 온라인 시대에 오히려 차별적 가치를 지닌다. 이 외에도 다양한 관계들이 차별적 가치로 인해 대면접촉으로 남을 것이다.
정리해 보면 이렇다. 우리 사회는 코로나 사태를 맞아 언컨택트 사회로 가속 진입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일상이 ‘언컨택트’화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언컨택트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효율, 심리, 상품 가치 등 다양한 요소들의 함수관계에 따라 우리 생활방식의 ‘컨택트’와 ‘언컨택트’의 비중이 결정될거란 얘기다. 그렇다해도 비대면접촉이 우리 삶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될 거라는 데 이견은 없다. 관련 기술이 발전하고 있고 또 다른 코로나 사태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시건축은 언컨택트 사회로의 진입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도시건축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한 삶을 담아내는 데 있다. 사회심리학자 같은 행복학 관련 전문가들은 인간의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간관계를 꼽는다. 앞서 이야기했듯 도시건축은 관계를 담아낸다. 그리고 동시에 관계에 영향을 준다. 도시건축 관련 전문가들이 변화하는 관계 맺기의 의미와 역할을 고찰, 공간 담론을 생산해야 하는 이유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기술과 더불어 심리, 정서를 포괄적으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 세기 전 산업화 시기를 맞아 탄생한 근대 도시건축론은 기계적 효율성이라는 단일 잣대로 우리 삶을 담아내려 했다. 그 결과 우리 삶을 건강하게 담아내지 못했다. 도시건축이 또 한 번 급진적 변화 앞에 선 지금 산업화시대의 도시건축론처럼 심리적, 사회적 가치를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에서 비대면 ‘접촉’과 비대면 ‘접속’이란 표현을 혼용한 이유는 예시로 든 현실 속 비대면접촉을 설명하는 데 있어 접속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20-04-20
자세한 내용
건축은 조각이 아니다. 건축은 공간으로 사람과 환경을 매개한다. 그래서 시각적 감상만으로 그것이 내포한 가치를 온전히 가늠하기 어렵다. 공간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건축적 가치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 이유다. 2020년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아일랜드 건축가 이본 패럴(Yvonne Farrell, 1951~)과 셸리 맥나마라(Shelley McNamara, 1952~)가 선정되었다. 참고로 프리츠커상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린다. 그만큼 최고 권위의 상이란 얘기다.

이본과 셸리의 건축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관계 만들기’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건축을 들여다보면 도시와 건축, 자연과 사람의 관계 맺기에 대한 고민이 보인다. 실제 이들은 건물이 들어설 문화적, 지형적 맥락을 해독하고 건축으로 지형을 더해간다. 다시 말해 조형미보다 맥락적 조응을 창출하는 데 더 집중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들의 건축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양한 사회적 교류를 유발할 공간 만들기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내부 이용자들 간이나 내외부인 간의 다양한 시각적, 공간적 교류를 가능케 하는 공간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는 얘기다. 이들의 건축을 보면 사람들 간의 다양한 교류를 촉진하고 거리에 그 풍경을 적극적으로 제공한다. 그럼으로써 건축은 공동체 의식(Sense of Community) 강화를 유도한다. 공동체 의식은 지속 가능한 사회 만들기와 개인의 행복 추구를 위한 필수 요소다. 이렇듯 이본과 셸리는 건축을 통한 사회적 가치 창출에 집중한다.

건축은 다양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어느 가치에 좀 더 집중하느냐는 건축가마다 다르다. 프리츠커상 수상자들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2004년 수상자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故 자하 하디드의 경우 틀을 깨는 비정형적 공간과 형태를 바탕으로 랜드마크를 만드는 데 집중했고 2009년 수상자인 페터 춤토르의 경우 물성과 공간으로 시학적 감성을 자아내는 데 집중했다. 반면에 2016년 수상자인 알레한드로 아라베나의 경우 건축적 아이디어를 통해 저소득 계층의 주거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프리츠커상 수상 소식은 매해 수상자들의 다양한 건축 철학만큼이나 다각적으로 건축을 이해할 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건축 문화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부는 여전히 일차원적으로 건축을 이해하는 듯하다. 심지어 건축을 ‘문화’가 아닌 ‘경쟁’ 프레임으로 오독하기도 한다.
지난해 정부는 프리츠커상 수상 지원 전략을 발표했다. 국토교통부가 청년 건축가를 선발해 해외 유수의 설계 사무소에서 설계 기법을 배울 수 있게 연수비를 지원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여덟 명이나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우리는 한 명도 없다는 이유였다. 건축설계를 손 기술 정도로 이해하는 건지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은 학원 근성과 엘리트주의가 작동한 까닭은 아닐까? 그래서 소수 정예가 단기간에 비법을 배워 목표를 선취할 수 있다는 발상으로 귀결된 게 아닐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문화는 학원 근성과 엘리트주의로 한순간에 쟁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 수상이 정부의 정예 감독 육성 결과가 아니듯 말이다.

건축에 대한 척박한 인식은 비단 국토교통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규모 민간 자본과 지자체는 여전히 ‘훌륭한 건축 = 랜드마크’라는 강한 믿음 외에는 건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상품 차별화나 도시 경쟁력 확보를 앞세워 우월적 랜드마크 만들기에 집중한다. 다시 말해 건축을 문화로 보지 못하고 전략으로 보는 것이다.
문화적 토양이 척박하면 프리츠커상 같은 꽃은 피기 어렵다. 설사 핀다 한들 화려한 꽃 한 송이로 척박한 건축 문화를 가려낼 수도 없다. 문화적 토양이 비옥해지면 꽃은 자연스레 핀다. 최근의 대중문화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K-팝의 세계화는 기획사의 체계적인 인큐베이팅 시스템이 자리 잡은 덕이며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 수상은 오랜 시간 스크린 쿼터제로 한국 영화를 지지해준 결과다. 건축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건축의 문화 산업적 성격을 이해하고 건축이 문화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노력하다 보면 프리츠커상은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자. 이본과 셸리도 40년이 넘는 세월을 정진해 일흔이 다 된 나이에 프리츠커상을 받지 않았나. 꾸준히 걷고 또 걷자.

CREDIT
글쓴이 전상현(Space Matter 대표, 국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에디터 김나랑
사진 GettyImagesKorea
2018-07-20
자세한 내용
지역 재생에 가장 효과적인 아이템 중 하나가 문화, 예술이다. 실제 성공 사례도 많다.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과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대표적이다. 이제는 대중도 문화, 예술이 재생을 불러온다는 상식을 갖출 정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술섬이라는 전략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섬이라는 장소를 놓고 보면 탁월한 개념이자 전략이다. 섬은 교통과 통신으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지만 단절된 장소로 인식된다. 그러다 보니 외지인에게 섬은 탈(脫)일상의 장소다. 이러한 이유로 섬은 개발이나 재생에 있어 일반적인 잣대로 전략을 세우기가 매우 어렵다. 다시 말해 편의 시설과 교통으로 대변되는 입지나 배후 인구 같은 일반적 기준으로 개발이나 재생의 성공을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러한 섬의 특성을 생각하면 예술섬은 재생에 있어 상당히 탁월한 전략이다. ‘평온한 고립’이라는 독특한 상황을 활용해 매력적인 장소로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오시마부터 제부도까지 예술은 고립된 평온을 배경으로 도심의 어느 미술관에서도 맛볼 수 없는 분위기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찾아가는 이유이자 ‘최고’가 아닌 ‘유일’의 전략을 추구한 결과다. 재생을 목표로 한 섬에 외지인의 유입은 상당히 중요하다. 재생이 성공하려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산업 혹은 생업의 쇠락을 겪은 섬이 다른 산업을 유치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앞서 얘기했듯 입지나 인구라는 경쟁 요소에서 뒤처지기 때문이다. 산업 대신 사람을 불러오는 전략적 선택이 유효한 이유다.
나오시마와 가파도는 예술을 통한 지역 활성화라는 표면적 특징 외에도 민간 기업 주도의 지역 재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보통 재생의 주체는 시민과 공공이다. 보존을 기반으로 한 중소 규모 재생의 경우 주민이 주체하고 공공이 지원하곤 한다. 뉴욕의 하이라인과 상하이의 티엔즈팡이 대표 사례다. 반면 대규모 개발을 바탕으로 추진되는 재생은 공공이 주도하곤 한다. 스페인의 빌바오와 런던의 도크랜즈가 대표적이다. 다시 말해 민간 기업이 재생의 주체로 나서는 일은 흔치 않다.
가파도와 연홍도의 미래에 나오시마 같은 청사진이 나올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재생의 특성상 성공 여부를 바로 판단할 수 없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 다만 예술섬을 벤치마킹하려는 지자체가 있다면 한 가지 부탁하고 싶다. ‘예술섬’이 아닌 ‘예술섬의 삶’을 들여다보라고 말이다.
약 10년 전 국내에 빌바오 열풍이 불었다. 멋들어진 뮤지엄 하나가 쇠락한 항구도시를 연간 100만 명이 찾는 명소로 바꾸어놓았다며, 언론은 연일 칭송했고 지자체에선 랜드마크 경쟁에 돌입했다. 빌바오의 성공을 ‘랜드마크 만들기=관광 자원화=도시 경쟁력 강화’로만 이해한 것이다.
빌바오가 추구한 것은 재생이다. 랜드마크를 통한 관광 자원화는 재생이라는 큰 그림 중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자체와 언론은 당시 빌바오 전체의 환경 개선이라는 종합 전략을 뒤로한 채 랜드마크라는 표상에만 집중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을 보지 못한 셈이다.
기우일지 모르지만, 지자체들 사이에서 예술섬 열풍이 분다면 빌바오 열풍과 같은 행태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자체는 재생 수단으로 ‘예술섬’이란 표상에 관심을 갖기 전에, 나오시마에서 베네세 재단이, 가파도에서 현대카드가 주민들의 삶에 주목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길 바란다. 주민의 삶이 예술섬에 녹아들지 않을 때 예술섬 전략은 재생이 아닌 환경 미화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CREDIT
에디터 김나랑 포토그래퍼 강은혜, 현대카드 제공
글쓴이 전상현(국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